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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웠던 ‘짝퉁 <시사저널>’에서의 추억
추천 : 130 이름 : 윤소영 작성일 : 2007-07-31 14:52:30 조회수 : 979

힘겨웠던 ‘짝퉁 <시사저널>’에서의 추억을 공개합니다

시사기자단 윤소영

짝퉁 시사저널에 사표를 내고 시사기자단에 합류한 '조업조.' 이들은 보장된 밥그릇을 내팽기치고 파업 기자들의 곁으로 왔다. '트로이의 목마'로 불리던 이들이 결합함으로써 시사기자단은 온전한 편집국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아래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윤소영씨.

 

2007년 1월. 우리는 파업을 결정했다.

나는 <시사저널>의 역사에 다시 부도를 겪는 일은 있더라도, 파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상식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우울한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시사저널>의 취재 기자를 제외한 제작부의 일곱 사람은 ‘짝퉁’ 사무실로 가게 되었다. 노조에서 ‘제작부는 조업에 참여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기자들에 비해 고용 형태가 취약한 제작부 직원들을 고려한 전략적 조치였다. 극구 사양하고만 싶은 짝퉁 사무실행 티켓을 받아든 나는 그저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정말 용산으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차라리 파업에 동참하며 동료들과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편할 듯싶어, 편집부 선배에게 슬쩍 물었다. “용산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파업으로 예민해진 선배에게 심란한 상황만을 늘려준 꼴이 되었는지, “노조의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면 노조를 탈퇴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그렇게 까칠하게 이야기했던 선배조차, 막상 노조위원장과 면담할 때에는 “우리가 용산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처음 겪는 파업에는 선배나 후배나 우리 모두 신입생일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끝끝내 인정하기 싫은 짝퉁 사무실로의 출근을 앞둔 <시사저널>에서의 마지막 마감일이었다. 일을 마치고 미술부 선배와 퇴근하는 길이었는데,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며 “그럼 다음 주에는 못 보는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 다음 주에는 그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매주 보던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이렇게 얄궂은 기분일 줄이야.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내 말에 그 선배까지 그 구질구질한 기분을 등에 업고 무겁게 집으로 갔을 것이다.

노조의 명을 받은 제작부의 일곱 사람은, 이후 몇 개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트로이의 목마’ ‘조업조’ ‘작전조’, 파업이 끝난 후에는 ‘황야의 7인’이라는 이름까지. 하지만, ‘짝퉁’ 사무실에서의 우리는 ‘트로이의 목마’처럼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도, 파업 전처럼 열심히 일하지도 못했다. 언제쯤이나 노조에서 귀환 명령이 떨어질까 기다리고만 있는 ‘파업대기조’일 뿐이었다. 초반에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술로 견디고, 술 빨이 떨어진 뒤에는 감정을 마비시키자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분노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자며 서로가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짝퉁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가려던 차에, 텔레비전에서 <시사저널> 기자들이 시위하는 모습이이 보도되었다. 안타까웠고, 화가 났다. 이 불합리한 상황이 널리 알려지기는 할지, 우려가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우리 파업대기조는 텔레비전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회사 측에서 고용한 짝퉁 제작자 몇 명도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짝퉁 멤버’와 ‘황야의 7인’이 텔레비전을 가운데 두고 시사저널 사태 관련 보도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가 공동관심사를 공유하면서도, 누구 하나 입도 뻥긋하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들과 우리는, 정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한일전 축구 경기를 보면서,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추고, 고조된 긴장감도 누른 체, 서로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이상야릇한 상황을.

그날은 유난히도 쓰디쓴 입맛으로 식사를 하러갔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외따로 지내던 우리 황야의 7인은 팔자에 없던 향수병까지 생겼다. 수박을 자르다가는 여자보다 더 예쁘게 수박을 자르던 미술부 남자 선배를 떠올리기도 하고, 술을 먹다가는 문득 어느 선배의 얼굴이, 어느 선배의 보조개가 생각난다며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리움에 청승을 떨었다.

가슴 아프게도, 현장을 누비며 기사를 써야할 진짜 <시사저널>의 ‘주인’들이, 짝퉁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거나 집회를 하고는 했다. 그렇게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유리창을 통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반가움 뒤로 따라붙는 한숨은 잘 포개어 놓은 채.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이런 청승을 떨어볼 기회가 있었을까? ‘그분’이 오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동료가 보고 싶고, 그립고, 반가울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애달프고 또 애달프게도, 우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절감하며 정든 <시사저널>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결말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했던 사태로 10년이나 다닌 회사에 사표를 내는 심정이 어찌 편안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슬프지만은 않다. 우리 ‘황야의 7인’이 낸 사표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는 짝퉁 사무실의 눈초리들을 뒤로 하고, 10년 동안 매주 한 호 한 호 마감하며 같이 지낸 동료들과 다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한 세상이 지겹거나 원망스럽지 않은 건, 나를 다시 그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데려다 놓아서일 것이다. 다음 5년 후의 세상은 나를 어느 자리에 갖다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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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쓴 윤소영은 <시사저널>에서 오퍼레이터로 10년 동안 일했다. <시사저널> 부도 직전인 1997년 새내기 직원으로 입사해 기자들과 함께 월급도 못 받으며 책을 만들던 힘든 시기를 함께 겪었다. 조업조 7인 전원은, 기자들이 사표를 내던 날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고 현재 시사기자단에 결합해 신명나게 매체 창간을 준비하고 있다. 시사저널 사태가 나기 전 직원 수는 31명. 현재 30명이 회사에 사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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